선박해양공학

[스크랩] 우리배 한선과 제주배의 역사

도운거사 2011. 1. 6. 09:32

 

<제목 차례>

1. 우리배의 역사 1

 1.1 우리배의 발달 1

  1.1.1 우리 배의 발생 1

  1.1.2. 통나무 쪽배(퉁궁이)의 발달 단계 1

  1.1.3. 고대의 한일-일한간의 교류 1

  1.1.4 구조선(도구를 이용하여 만든 배)의 발명 2

 1.2 우리 나라 배의 시대적 발달과 배의 종류 (현재까지 확인된 것)  2

  1.2.1. 원시시대→상고시대 2

  1.2.2. 삼한시대 3

  1.2.3. 삼국시대 3

  1.2.4. 통일신라시대   3

  1.2.5. 고려시대 4

  1.2.6. 조선왕조 시대 4

 1.3 우리 나라 배(韓船)의 역사 시대별 종류 5

  1.3.1 상고 시대 5

  1.3.2 삼한 시대 6

  1.3.3 삼국 시대 8

  1.3.4 통일신라시대 11

  1.3.5 고려 시대 14

  1.3.6 조선 왕조 시대 21

2. 일본배의 역사 41

3. 중국 당송시대의 선박 42

 3.1 선체의 구조 42

  3.1.1 용골과 외판 42

  3.1.2 수밀격벽  43

  3.1.3  조선재의 접합술 45

  3.1.4 염료와 염봉기술(舟念 縫技術) 47

 3.2 선박의 속구 47

  3.2.1 타(舵) 47

  3.2.2 帆과 桅 49

 3.3 결론 52

4. 제주배의 역사 54

 4.1. 덕판배 54

 4.2 떼배 55

5. 결론 56

 5.1 한선의 장점 56

 5.2 한선의 구조적 특성 57

 5.3 덕판배의 복원 59


1. 우리배의 역사


 1.1 우리배의 발달


 1.1.1 우리 배의 발생

  우리 나라의 배의 독특한 만듦새와 생김새를 갖춘 배를 [韓船]이라고 한다. 韓船은 떼배와 통나무쪽배(퉁궁이)가 서로 결합하여 차츰 발달하여온 평저선(平底船)이다.


 1.1.2. 통나무 쪽배(퉁궁이)의 발달 단계

  1 단계- 외쪽배(單材刳船) =독목주(獨木舟)

  2 단계- 외쪽배 양 옆에 뱃전을 덧댄 외쪽배(單材刳船 付 浮板)

  3 단계- 두개의 쪽배를 옆으로 짝지어 묶어 놓은 쌍쪽배(雙刳船)

  4 단계- 외쪽배 두개를 가운데 배를 갈라 맞붙인 두쪽배(複材刳船)

  5 단계- 두쪽배의 가운데에 한쪽을 더 넣어 맞붙인 세쪽배(三材刳船)

  6 단계- 외쪽배 위에 멍에를 걸고 돛대를 세워 돛을 매어 단 준구조선(準構造船)


  쪽배의 고고학적 출토 유물은 다음과 같다.


  (1)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압지에서 발굴 출토한 신라시대의 세쪽배

  (2)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가야시대의 쪽배 모양의 모형토선

     (흙으로 만든 조그마한 모형 쪽배)

  (3) 중앙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신라시대의 쪽배 모양의 모형토기

     (흙으로 만든 조그마한 쪽배 모양의 제사 기물)

  (4)日本大阪市難波村(오사까시 나니와무라)의이다찌江바닥에서발굴한두토   막 쪽배(복재고선), 관동지방 출토의 복재고선(複材刳船) (쪽배를 저판으로 하는 준구조선)

  (5)1970년까지도이와대껜(岩手縣)의오-후나와다시(大船渡)에서는통나무배(丸  木船)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丸太=マルタ” 또는 “단배(單排)=タンベ=炭을 실어 나르던 배”라고 불리었으며 갯바위 고기잡이배로 쓰였다고 한다.

  (6)日本에서 아주 유명한 미야자끼껜 사이도바루(宮崎縣西都原) 고분 출토의 하니와 (埴輪=ハニワ)라는 모형토선이 있는데 이것은 2~3世期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쪽배를 선체로 하는 준구조선의 모형선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도래한 도래인이 타고 왕래한 배의 모형이라고 한다.

  (7) 전남 진도 벽파리에서 발굴 인양한 송대의 통나무 쪽배(獨木舟 複材刳船)


 1.1.3. 고대의 한일-일한간의 교류


  위의 예에서 보았듯이 뗏목배와 퉁궁이가 한국의 동해안에서 일본의 서해안, 대마도, 구주 등지로 해류를 타고 또는 계절풍을 이용하여 이동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모양이 같은 쪽배의 고고학적 유물이 양국에서 출토되었다. 뗏목배의 명칭이 양국 상호간에 같다. 한일간 교류와 문화전파의 예는 그외에도 한국의의 三國史記 三國遺事, 일본의 日本書紀 萬葉集 등에 기록되어 있다. 日本의 고분에서 출토한 배모양토기 유물은 한반도에서 도래한 도래인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그 中에서도 바다를 건너 와야하는 문제가 제일 큰 난제였을 것인데 말할것도 없이 떼배, 퉁궁이=쪽배가 주로 이용된 것을 알수 있다.

  그후로 준구조선과 구조선이 발명되어 구조선들이 도해의 기구로 이용되었다.


  韓字가 唐字로 바뀐 例를 들어 보면 아래와 같다.

  韓船→唐船, 韓琴→唐琴, 韓子坂→唐子坂, 韓櫃→唐櫃→唐戶, 韓來→唐來→唐木, 韓子踊→唐子踊, 博多의 韓人町→唐人町.


1.1.4 구조선(도구를 이용하여 만든 배)의 발명


  뗏배나 쪽배는 범주를 세우고 묘를 걸어 먼 곳 또는 먼 나라 (日本의 서해안, 대마도, 구주) 까지 행선을 할 수 있었으나 그 이상 구조상의 발전은 기원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인간은 불을 발견하여 활용하게 되고 또 쇠붙이(동, 청동, 철)를 발명하여 도구를 만들게 되었다.


  불, 청동, 주물 등을 활용하여 도구 즉 칼, 끌, 도끼, 자귀, 쇠못, 쇠띠 등을 만들고 이러한 것을 활용하여 나무를 자유자재로 제재(製材)하여 얇은 판자와 각목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러한 목재를 이용하여 지금까지 쓰던 떼배나 쪽배 보다 더 낳은 탈것을 창안하고 조립하여 만들었는데 이러한 배를 구조선(構造船)이라고 한다.


1.2 우리 나라 배의 시대적 발달과 배의 종류 (현재까지 확인된 것)


1.2.1. 원시시대→상고시대


  (1) 통나무(丸大) - 통나무 토막 그 자체를 이용하여 타고 다님

  (2) 떼배(桴,筏) - 여러 개 통나무를 옆으로 이어서 만든 것

  (3) 쪽배(刳船) - 통나무 속을 파낸 소 죽통과 같은 퉁궁이

  (4) 독배(甕筏) - 독 여러 개를 묶어서 만든 독배-압록강

  (5) 함지박 - 나무로 만든 커다란 함지박 (나무통) -동해안

  (6) 고래잡이 쪽배 - 경남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의 쪽배


1.2.2. 삼한시대


  (1) 가야시대 선형 토우선과 같은 쪽배(刳船) - 화물 운반, 항해

  (2) 2단계 쪽배(刳船) - 남해안에서 쓰시마 규-슈(九州)로 항해


1.2.3. 삼국시대


  (1) 고구려

     ① 수나라와의 전쟁 때 건무의 수군 전함

       - 文德 詩 :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② 당과의 전쟁 때 수군 전함

  (2) 백제  

     ① 동진, 수당과의 교역을 한 백제선   

     ② 중국의 서해안으로 진출한 백제선 [당의 서북지방식 해선]

    *③ 일본에서 건조한 백제식 사견선(使遣船)

         [일본제 백제식 견수선, 견당선→ 大內氏式 → 광도(廣島)에서 건조한 견당선]

  (3)  신라  

     ① 금령총 출토의 제사용 토기와 같은 쪽배(刳船)

     ② 안압지 출토의 제5단계 쪽배(刳船)

     ③ 의상이 타고 간 견신나사 당선과 같은 교역선

     ④ 일본과 교역을 하던 무역선

    *⑤ 일본에서 건조한 신라식 해선

         [일본제 신라식 해선→ 저명부식 무고에서 건조한 해선→ 이세식 해선]


1.2.4. 통일신라시대 


  (1) 신라본토에서 건조한 신라식 교역선 - 663년에서 828년 이전

  (2) 청해진에서 장보고대사가 건조한 교관선 - 828년에서 846년 이전

  (3) 왜구토벌에 출전하여 공을 세운 전함

  (4) 서남해방수의 견훤의 함선 

 *(5) 일본에서 건조한 견당선

      [일본제 백제식 견당선→ (광도)에서 건조한 해선]→ 역사 기록상 신라선]


     - 假定 1.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백제를 합방하게 되니 역사 기록에서 백제국이 사라지게 되고, 백제로 기록하던 국명 지명 물명 등은 모두 신라로 바뀌게 된다. 그로  인하여 “백제식 견당선”의 이름도 없어지고 “신라선”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고구려식 해선”의 이름도 없어지고 ‘신라선’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例 : 韓人→唐人. 韓人町→唐人町. 韓人踊→唐人踊 --- 일본의 역사 기록

                 例 : 三國史記卷第三十六 雜志第五 地理 三 

                     “武州本百濟地神文王六年爲武珍州” --- 金富軾의 역사 기록

                 作文 例 : “遣唐船本百濟船...爲新羅船” --- 統一新羅 時代의 新羅, 日本의 作文

  

     - 假定 2.중국의 동해안으로 진출한 [백제선] → [당의 북동해안식 해선]을 건조하던 조선장(재당 백제인이지만 역사 기록상으로는 재당 신라인)이 일본에 와서 건조한 배는 [재당 신라인 조선장이 조선 공작을 한 견당선] = [신라선]으로 역사서에 기록하였을 것이다.

           

1.2.5. 고려시대

 

  (1) 태종의 누선(戰艦)

  (2) 과선(鬪船)

  (3) 초마선(漕運船)

  (4) 고려도경(徐兢 著) 책속의 순선, 관선, 송방, 막선

  (5) 고려도경(삼족오태양문) 거울에 조각되어 있는 고려 원양선

  (6) 몽고 고려 연합함대의 日本 박다 공략 [원구습래회사] 속의 고려 전함

  (7) 전남 완도에서 발굴 인양한 완도선 (청자 도자기 운반선)

  (8) 전남 목포에서 발굴 인양한 달리도선 (도자기 운반선)

  (9) 왜구를 토벌한 정지 장군의 화포를 탑재한 전함

  (10) 대마도를 정벌한 박위 장군의 화포를 탑재한 전함


1.2.6. 조선왕조 시대


  (1) 전함     -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

                 전선, 귀선, 병선, 사후선, 해골선

  (2) 관선     - 조선통신사선, 조운선(세곡선), 경강 수하선, 경강 수상선,

                 세곡 평저선=광선(늘배), 진도선(나룻배), 거도선(거룻배)

  (3) 어염상선 - 어선, 상고선(무역선), 廣船(늘배), 釣舟(낚싯배)

                 艍舠(거루), 單帆船(야거리), 雙帆船(당두리)


1.3 우리 나라 배(韓船)의 역사 시대별 종류


  우리 나라의 서남해안은 간조와 만조 때의 변화가 심하다. 최대 간만의 차이는 인천에서 평균 8 m 이상이 된다. 해안의 드나듦이 복잡하며, 평평하고 길고 넓은 갯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지리적, 지형적 여건에 가장 적응하기 쉬운 형태인 평평한 배밑(平底)을 가진 뗏목배가 발달하게 되었다. 배 밑이 평평한 배는 만조 때 밀물을 타고 갯가로 들어와서 간조때 썰물이 빠지면 배는 그대로 갯가 바닥에 편하게 앉을 수 있기 때문에 운용에 편리하다. 제주도의 뗏목배 태우나 명주군 정동진의 토막배는 그 배 자체가 한선의 배밑(平底)이 된다.

 우리 나라의 한선은 이러한 배밑을 기본으로 하여 발전하여 왔다. 뗏목배와 안압지의 통나무 쪽배가 결합하여 준구조선이 만들어 졌다, 두꺼운 삼판(杉板)을 겹쳐서 무어 올리고 참나무 못으로 결합하는 배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구조선이라고 한다. 三板式은 거루, 五板式은 야거리, 七板式은 당두리, 九板式은 조운선(漕運船)이 된다.   


1.3.1 상고 시대

 

                   

<그림 1>청동기 시대에 사용하였던 “고래잡이” 통나무 쪽배(퉁궁이)

所在: 蔚州 盤龜臺,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典: [民學 1輯] 拓本


  둥근 통나무 여러 개를 옆으로 엮어서 만든 뗏목배와 둥근 통나무의 속을 파내서 만든 통나무 쪽배(퉁궁이)는 해상의 주요 교통 수단으로서 사람들이 이동을 할 때나 하물을 운반할 때에 이용하였다. 江에서는 짐을 나르는 짐배로 쓰이기도 하고   강을 건너는 나룻배로도 이용되었다. 뗏목배와 통나무 쪽배(퉁궁이)는 어업 활동을 할 때에는 어선으로 사용되고 어염(魚鹽)을 실어 나를 때에는 운반선으로 사용되었다.


1.3.2 삼한 시대


  뗏목배가 발달하여 고물에 노를 설치하고 노를 저어서 가까운 거리를 내왕하기도 하고 돛풀(부들풀=香蒲)로 짠 자리를 돛대에 매어 달고 바람을 받아 먼 곳을 내왕하기도 하였다.

 

통나무 쪽배(퉁궁이)는 양쪽 뱃전의 노걸게에 노를 매어 달고 노를 저어 이동하였으며 배 한가운데에 돛대를 세우고 돛을 달아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어로 활동도 하였다. 삼한(三韓)의 사람들은 돛을 단 통나무 쪽배나 뗏목배를 이용하여 왜국으로 도해(渡海=遠洋航海)도 하였다.


 

 


<그림 2> 강릉 정동진의 뗏목배 (토막배)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그림 3> 제주도의 뗏목배 (태우) - 자리돔 잡이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1.3.3 삼국 시대


1. 고구려(高句麗)


  고구려는 수(隋) 나라와의 전쟁때 병선을 이용하여 적 수군을 격퇴하였다. 위(魏)와 연합 전선을 편 고구려는 수군 함대를 요하(遼河)에 진입시켜 공손연을 토멸하였다.

  광개토대왕은 병선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한강 유역을 공략하고 백제의 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멀리 탐라(제주도)를 공략하고 고구려에 귀속시켰다.1)    

  서해를 건너 산동 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해상 교통로를 개척하고 육로와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과 조공 무역을 하였다.


 

 


<그림 4> 두만강의 통나무 쪽배 (퉁궁이)

出典 :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2. 가야(伽倻)


  가야는 가야 지방에서 출토한 통나무 쪽배(퉁궁이) 모양의 토용과 같이 생긴 통나무배를 이용하여 왜국과 일찍부터 왕래를 하였다.



 

 


<그림 5> 가야 시대의 통나무 쪽배 모양의 토용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所藏: 호암미술관


  일본에서는 사이도바루(西都原) 고분에서 가야의 통나무배 모양과 닮은 배 모양의 토용 식륜([하니와]= 흙으로 만든 모형)이 출토된 바 있다.


 

 


<그림 6> 일본의 사이도바루(西都原) 고분 출토의 배 모양

出典: [日本의 船]  船の 科學館                 


3. 백제(百濟)


  백제는 372년에 서해를 건너 동진(東晉)과 해상을 통한 조공 무역을 시작하였으며 중국의 서해안 일대에 진출하여 영역을 넓혔다.

  백제는 흑산도를 지나는 해상 남로를 개척하였고, 양진 남북조 수(隋) 당(唐)과 교역을 하였다. 왜국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왜국을 경영하며 선박을 이용하여 왕래하였다. 왜국에서는 650년에 아기(安藝)국에 명하여 백제인으로 하여금 백제식 견당사선을 건조하게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아기(安藝)국에서 견당사선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안예국=지금의 廣島)


 

 

<그림 7> 日本에서 건조한 백제식 견당사선

出典 : 石井謙治 [和船史話] 至誠堂 1983


4. 신라(新羅)


  경주의 금령총에서 출토한 통나무배 모양의 제사 토기와 같은 통나무 쪽배를 이용하여 어로 활동도 하고 돛을 매어 달아 멀리 왜국으로 항해하며 왕래하기도 하였다.

  통나무 쪽배의 유물로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한 3쪽 짜리 통나무 쪽배가 있는데 이것은 제 5 발달 단계에 속하는 아주 잘 발달된 배이다.

  신라는 왜국과 인접한 지리적 여건으로 300년경에 신라의 사신선을 왜국에 파견하였으며 조선장을 왜국에 보내서 신라식 해선을 건조하게 하였다.

 

 

 

           <그림 8> 금령총에서 출토한 통나무 쪽배 모양의 제사용 토기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所藏: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9> 안압지 출토의 퉁궁이 쪽배(세쪽배)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所藏: 국립경주박물관

 

 

 

 


<그림 10> 의상 대사의 화엄연기(華嚴緣起)에 수록된 당사선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典: [華嚴緣起繪卷]


1.3.4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는 백제의 건조 기술과 항해술을 수용하고 계승하여 당과 해상을 통한 교역을 하였다. 장보고(張保皐)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대사가되어 수군의 본거지로 삼아 해적을 소탕하고, 교관선(交關船=交易船)을 이용하여 신라와 당 그리고 日本을 잇는 삼국간의 해상 교역을 활발히 하였으며 삼국간 해역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그림 11> 日本의 엔닌(圓仁) 구법승이 타고 귀국한 교역선(和船式)

出典 : 石井謙治 [和船史話] 至誠堂 1983


 

 

<그림 12>  통일신라시대의 교역선  복원 설계도 

                 復元: 李元植-設計․元仁古代船舶硏究所-造船 2000. 8.


 

 


<그림 13> 통일신라시대의 교역선 복원 모형  S= 1/2

復原: 李元植-設計. 元仁古代船舶硏究所-造船 2000.



 

 


<그림 14> 통일신라시대의 교역선 복원 모형  S= 1/2

復元 : 李元植-設計․元仁古代船舶硏究所-造船 2000. 8.


1.3.5 고려 시대


  고려는 막강한 수군 함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고려의 왕건은 여섯 차례나 후백제의 견훤을 공략하여 섬멸하였다. 해양 세력을 주축으로 반도를 통일하게 된 통일 고려는 수군 전함 뿐만이 아니라 조운선과 기타 전투선도 크게 발달하였다.

 

1.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소개된 고려선(高麗船)


  1123년에 宋나라의 서긍(徐兢)이라는 사신(使臣)이 고려에 와서 보고들은 것을 적어 놓은 견문록인 「고려도경(高麗圖經)」이 있는데, 여기에는 주즙(舟楫=船舶) 편에 고려의 순선(巡船), 관선(官船), 송방(松舫), 막선(幕船) 등에 대한 배의 생김새와 만듦새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1) 순선(巡船=순라를 도는 배)의 구조

  “中安一檣. 上無棚屋. 惟設艣舵而己... 皆揷旌旗. 舟人邏卒皆着靑衣”(“배 가운데에 돛대를 하나 세웠다. 배의 겻집(鋪板=甲板) 위에는 뱃집(棚屋=樓屋)이 없다. 다만 노를 걸고 고물에 치를 꽂았다. 배에는 정기(旌旗=군의 임무를 나타낸 깃발)를 꽂았으며, 뱃사람과 순라군은 모두 푸른색 옷을 입었다.”)

  순선의 구조에 대한 설명은 한선의 야거리 평선(平船)의 구조와 똑 같다.    

         

  (2) 관선(官船=관에서 쓰는 배)의 구조

  “上爲茅蓋. 下施戶牖. 周圍欄襤. 以橫木相貫. 挑出爲棚. 面濶於底. 通身不用板簀. 唯以矯揉全木. 使曲相比釘之. 前有矴輪. 上施大檣. 布帆二十餘幅...惟接伴船有陳設屋幕焉”(“뱃집의 위는 뜸으로 지붕(덮개)을 덮었다. 그 아래에는 문짝과 창문을 달았다. 뱃전 둘레에는 난간이 있다. 멍에(橫木=가로로 댄 나무)로 양쪽 삼판을 서로 꿰뚫어 내었으며 그 끝은 뺄목이 된다. 배의 윗면은 뱃밑 바닥 보다 넓다. 배의 선체 안의 (船艙)에는 나무 판자(隔艙壁)나 대나무 삿자리로 가로막아 대지 않았다. 다만 구부려 바로 잡은 긴 통나무 막대기(참나무 장쇠)를 걸고. 그 양끝은 삼판에 꿰어서 박아 서로 쐐기 물림을 하였다. 배의 앞쪽 이물에는 닻줄 물레가 있다. 뱃집 위에는 허리 돛대를 세우고 스무나무 폭의 돛을 느렸다. 접반선에만 屋幕(천막을 친 집)을 진설하였다.”)



 

 


<그림 15> 高麗의 관선(官船)과 닮은 海船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3) 송방(松舫=소나무 배)의 구조

  “松舫群山島船也. 首尾皆直. 中爲舫屋五間. 上以茅覆. 前後設二小室”(“松舫은 군산 섬의 배다. 배의 앞의 이물비우와 뒤의 고물비우가 다 같이 평평하고 곧게 되어 있다(方頭 方艄). 배 위의 가운데에 다섯 칸의 뱃집이 있다. 위는 뜸으로써 덮개를 하였다. 앞과 뒤에 작은 선실 방 두개를 들였다.”) 


  (4) 막선(幕船=막을 둘러 친 배)의 구조

  “以待中下節使人也. 上以靑布爲屋. 下以長竿代柱. 四阿各以朱. 繩係之”(“중급과 하급의 사절들이 타고 기다리는데 쓰인다. 위는 푸른 천으로 집을 만들고 아래는 기둥 대신에 긴 장대를 썼으며 네 귀퉁이를 붉게 칠하고 장대를 동아줄로 잡아매었다.”)

  


 

 


<그림 16> 막선(幕船)의 “遮日幕=遮日屋”의 구조와 비슷한

 신윤복의 강배의 차일막(遮日幕) 그림

出典 :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2. 고려동경(高麗銅鏡=惶丕昌天 銘)속의 고려선(高麗船)     


  (1) 고려동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에 고려시대의 구리 거울(銅鏡)이 있는데 이 거울의 뒷면에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배의 이물과 고물은 높이 솟아있고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각의 그림으로 보아 앞에서 본 고려의 관선의 모양과 똑 같이 생겼다. 그림의 위쪽에는 해(세 발가락이 달린 까마귀가 들어 있는 것)와 달(계수나무와 토끼가 들어 있는 것)이 떠있다. 세 발가락이 달린 까마귀(三足烏)는 고구려 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과 똑 같다. 이 동경의 조각 그림에서 고구려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를 계승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조각 그림의 맨 위에는 황비창천(惶丕昌天) 이라는 명(銘=새겨 넣은 글씨)이 있다.

 

 

<그림 17> 고리동경(高麗銅鏡)

 出典 :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所藏 :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18> 고리동경(高麗銅鏡)

     出典 :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所藏 : 공주박물관


  (2) 宋의 동경

  1981년에 중국의 강소성  보응현(江蘇省 寶應縣)에서 출토한 동경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해선문동경(海船紋銅鏡)이라고 한다. 거울의 명(銘)은 황비창천이다. 이 거울의 조각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려동경의 거울의 조각과 비슷하다. 다만 해와 달이 없다. 공주박물관 소장품에 고려동경(황비창천 銘)이 있는데 이 동경의 모양이나 조각의 그림이 중국의 해선문동경과 똑 같다.  

 

 

<그림 19> 해선문동경(海船紋銅鏡)

出典: 中國古船圖譜 王冠倬 三聯書店 2000, 所藏: 中國 江蘇省 寶應縣


3. 고려전함(高麗戰艦)

 

 

<그림 20> 고려의 평전선(平戰船)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典: National Geographic, February 1997


  몽골-고려 연합군은 1274년과 1281년 2차례에 걸쳐서 日本 규-슈의 하까다(九州 博多)를 공략하였다. 이때 타고 갔던 배는 전라도의 천관산 해안, 변산반도 해안과 마산의 합포 등지에서 고려식 선형으로 건조한 전함이다. 고려의 전함에는 평전선(平戰船)과 누전선(樓戰船)이 있다.

 

 

<그림 21> 고리의 누전선(樓戰船)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典: National Geographic, February 1997


4. 완도(莞島)에서 발굴 인양한 고려선 (완도선)


  1985년에 완도 근해에서 10-11세기경의 도자기 운반선이 인양되었는데, 배밑은 통나무를 옆으로 이어 마치 뗏목배와 같은 평저선(平底船) 구조로 되어 있으며 첫 번째 뱃전(杉板)인 부자리(不者里)를 배밑 가장자리 토막(庶子) 위에 턱홈을 파서 얹어 놓고 나무못을 박아 묶었다. 그 생김새가 마치 안압지에서 출토한 통나무배의 양쪽 뱃전과 똑 같으며, 그 뱃전을 그대로 가져다 얹어 놓은 것 같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한선의 선형은 10-11세기 이전에 이미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완도 근해에서 발견하여 인양한 이 고려선은 해남 완도 장흥 일대의 연근 해안을 항해하면서 생활용 도자기와 생활용 토기 등을 무역 하던 배였다. 이러한 배를 상고선(商賈船) 또는 무역선(貿易船) 이라고 한다.

  

이 고려선(완도선)이 발굴되므로 해서, 문헌을 중심으로만 논의되어 왔던 한선의 선형이 밝혀지게 되었고, 전래되고 전승되고 있는 전통 한선에 대한 조선 공작 기법(技法 法式)이 사실로 확인되는 등 여러 가지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이 고려선을 기준으로 해서 전시대와 후 시대의 한선의 선형과 조선기술 조선기법등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 22> 고려선(완도선)의 배밑(底板)

出典 :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寫眞 :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그림 23> 고려선(완도선)의 중앙횡단면 복원도 (도면․이원식 1990)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圖: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돛대


       ← 난간


       ← 멍에


       ← 삼판(뱃몸)


       ← 뱃밑




<그림 23(1)> 고려선(완도서)의 중앙횡단면 복원도 (도면․이원식. 2002. 7. 수정)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圖: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그림 24> 고려선(완도선)의 복원 모형  S= 1/2

展示: 국립해양유물전시관, 復元: 李元植-設計. 元仁古代船舶硏究所-造船 1993. 10.


1.3.6 조선 왕조 시대


1. 싸움배(戰艦)


  조선왕조 시대의 초기에서 후기까지 전함의 제도의 변천은 아래 표와 같다.


<표 1> 조선시대 싸움배의 제도(制度)와 변천

구분

연대

자료명

배의 가름

제도

1454

세종실록지리지

대선(大船)

중대선(中大船)

중선(中船)

제도

1455

단종실록

대선

중선

소선(小船)

제도

1460

경국대전

대맹선(大猛船)

중맹선(中猛船)

소맹선(小猛船)

실제

1592-1815

湖左水營誌

一戰船, 二戰船

三戰船, 四龜船

 

제도

1615

권반(權盼)의 實行節目

전선

차선(次船)

 차선(之次船)

 

제도

1746

속대전(續大典)

전선

방선(防船)

兵船, 伺候船

도본

1800

各船圖本

상전선(上戰船)

邑鎭戰船

병선(兵船)

<표 2> 이순신 수사(李舜臣 水使)가 창제(創制)한 거북배의 칫수(龜船 値數)

자    료    이    름

연    대

배밑 길이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

1592 - 1815

10발

이충무공 종가 소장 거북배 그림

1600 - 1800

10발

여암전서(旅菴全書) 병선론

1712 - 1782

10발

  싸움배(戰船)를 판옥선(板屋船)이라고도 한다. 전선은 당두리의 기본 구조로 되어 있다. 싸움배(戰船)는 포판 위에 판옥을 꾸며 적의 총탄으로부터 노군과 군사들을 안전하게 엄호하였으며 피해를 막았다.

 

  통제사(統制使)가 기선(騎船)하는 싸움배를 상전선(上戰船) 또는 좌선(座船)이라고 한다. 싸움배 중에서 제일 크다. 큰 대포(천자포, 지자포, 현자포, 황자포)를 탑재하고 좌우 현(舷)의 멍에 뺄목의 노창(櫓窓)에 노 10 척씩을 건다. 절도사(節度使)가 기선하는 싸움배를 읍전선(邑戰船), 수군만호(水軍萬戶) 부사(府使) 군수(郡守)가 기선하는 싸움배를 진전선(鎭戰船)이라고 한다. 싸움배 중에서 두 번째 세 번째로 크다. 중간 대포를 탑재하고 좌우 현의 멍에 뺄목의 노창에 노 8 척씩을 건다.

  (1) 각선도본(各船圖本) = 전병각선도(戰兵各船圖)

  이 배 그림들은 정조(1776-1800) 때 그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두 6장의 투시 설계도가 들어 있는데 전선도(戰船圖) 1장, 상장을 떼어낸 전선도(撤上粧戰船圖)

1장, 평전선도(平戰船圖) 1장, 병선도(兵船圖) 1장, 조선도(漕船圖) 1장, 북조선도(北漕船圖) 1장 등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옛날의 조선용 설계도로서, 건축용 설계도를 그리는 기법으로 그렸다. 45°투시도법으로 배를 자세하게 그렸고 채색도 하였다. 그리고 배의 만듦새와 치수도 기록하였으며 구조에 대한 설명도 하여 놓았다.   

 

 


<그림 25> 전선도(戰船圖) - 각선도본 중에서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典: 奎章閣 所藏

 

 


<그림 26> 철상장(撤上粧) 전선도(戰船圖) - 각선도본 중에서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典 : 奎章閣 所藏 

 

 


  <그림 27> 평전선도(平戰船圖) - 각선도본 중에서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典: 奎章閣 所藏



 

 


<그림 28> 병선도(兵船圖) - 각선도본 중에서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典 : 奎章閣 所藏        


 

 


<그림 29> 조선도(漕船圖) - 각선도본 중에서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典: 奎章閣 所藏 


 

 


<그림 30> 북조선도(北漕船圖) - 각선도본 중에서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典: 奎章閣 所藏


  (2) 전선(戰船) = 판옥선(板屋船)

  판옥 전선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삼판 7쪽을 이어 붙여 올린 뒤에 멍에를 걸고서 그 위에 귀틀을 짜고 겻집(鋪版)을 깔았다. 여기까지를 평선(平船)이라고 한다. 2층을 상장(上粧)이라고 한다. 1층의 멍에 뺄목 위에 신방(건축의 기둥 밑 방재)을 걸고 그 위에 상장을 올릴 기둥을 세운다. 기둥 위에는 언방(건축의 상방)을 건다. 언방에 상장 멍에를 걸고 그 위에다가 널판을 깔았는데 이것을 청판(廳板)이라고 한다. 상장의 네 주위에는 여장(女牆)을 둘렀으며 방패의 역할을 한다. 상장의 청판에서 이물 돛대와 한판 돛대를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게 장치를 하였다. 또 청판 위 한가운데에 다락을 만들고, 그 위에 좌대(座臺)를 만들어 가마 지붕을 씌운 뒤 장막을 쳤다. 통제사는 이 좌대에서 모든 배와 군사를 지휘한다. 이 좌대를 장대(將臺)라고 한다.




         


 

 

<그림 31> 병풍 속의 전선 - 통제사의 좌선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所藏: 海軍士官學校

 

 

<그림 32> 전선의 복원모형 S= 1/20

 展示: 국립해양유물전시관, 復元: 李元植-設計. 元仁古代船舶硏究所-造船 1993. 10.


  (3) 거북배(龜船) - 이순신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창제한 거북배

  귀선은 1592년(임진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全羅左道水軍節度使 李舜臣)이 창제하였는데 그 구조와 성능을 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장차 왜적의 침입을 염려해 따로 전선 크기 만한 배를 만들었는데 배 위를 둥그스름하게 판자로 덮고 그 위에 창칼을 꽂았다. 적군들이 배에 기어오르거나 뛰어 내리면 그 창칼에 찔려 죽게 된다.“

  “배의 앞에는 용머리를 달고 그 용의 입을 통하여 대포알을 쏘았다. 뒤에는 거북꼬리를 달고 총구를 냈다. 배의 좌우에는 각각 6개의 대포 구멍을 냈다. 거북배에는 돌격장이 타고 함대의 선봉이 되어 나간다. 적이 에워싸고 덮치려 하면 일시에 대포를 놓아(放砲=射擊) 가는 곳마다 휩쓸어 임진왜란의 크고 작은 해전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모습이 엎드린 거북과 같으므로 ‘거북배’라고 하였다.“ (李忠武公全書)


  (4) 통제영 거북배(統制營 龜船)

  1795년(정조19)에 편찬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책머리에 통제영거북배와 전라좌수영 거북배의 그림과 그 설명이 있다. 모두 694자로 되어 있는데 거북배의 주요 치수와 만듦새, 기능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림 33> 1795년식 통제영 귀선도 (이원식 도면 1975)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典: 李忠武公全書


 

 

<그림 34> 1795년식 통제영 거북배의 중앙횡단면도 (이원식 도면 1975)

出典 :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5) 전라좌수영 거북배 (全羅左水營 龜船)

  1795년 통제영 거북배의 설명문 다음에는 그 당시의 전라좌수영 거북배의 치수와

구조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그림 35> 1795년식 전라좌수영 귀선도 (이원식 도면 1975)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典:  李忠武公全書


 

 


<그림 36> 1795년식 전라좌수영 거북배의 중앙횡단면도(이원식 도면 1975)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그림 37> 1795년식 전라좌수영 거북배의 복원 모형  S= 1/2 

展示: 仁川 仁川重工業 埠頭, 復元: 李元植-設計. 元仁古代船舶硏究所-造船 1971. 7.




 

 


<그림 38> 1795년식 전라좌수영 거북배의 복원 모형  S= 1/5 

       展示: 세계 EXPO '86,  復元: 李元植-設計. 元仁古代船舶硏究所-造船. 1986.

  


 

 

<그림 39> 1795년식 전라좌수영 거북배의 복원 모형   S= 1/25 

전시: 울산 현대중공업주식회사

 復元: 李元植-設計․元仁古代船舶硏究所-造船 1998. 10.


  (6) 돛단 거북배(雙帆龜船)


 

 

<그림 40> 쌍돛단 거북배(雙帆 龜船)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원전 : 임진장초 영인본

 

  선체의 형태는 앞의 전라좌수영 거북배의 그림과 거의 같다. 다만 이물에는 용두를 달았으며 고물에는 꼬리를 달았다. 장대(將臺)를 세우고 좌대를 꾸미고 가마 지붕을 하고 장막을 둘렀으며 차일을 쳤다. 이물 돛대와 한판 돛대를 세우고 돛을 올려 행선 하는 모습이다. 돛대 꼭대기에는 꿩의 깃털을 꽂았다. 그 아래에는 바람의 방향을 알려 주는 풍향기 깃발을 꽂았다.


  (7) 병선(兵船)   

  병선(兵船)의 선형은 전통적인 한선의 평선(平船)과 같다.

병선(兵船) 또는 방패선(防牌船)은 당두리의 기본 구조로 되어 있다. 포판위에 난간을 설치하고 방패를 둘렀다. 수군 군사들이 기선한다. 작은 대포를 탑재하고 좌우 현에 노 4 척씩을 건다. 주위 난간에 방패를 설치한다. (또는 세운다)

 

 

<그림 41> 병풍 속의 병선(방패선)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소장 : 해군사관학교


  (8) 사후선(伺候船)

  사후선(伺候船)은 야거리 또는 작은 당두리의 구조로 되어 있다. 사후선은 선단의 맨 앞으로 나가 적정을 살피고 적선을 발견하게 되면 신기전(神機箭)으로 신호를 보내 적의 동태를 알린다. 신기전통을 탑재하고 노 2척을 거는데 기선 인원은 5명이다.  



 

 

<그림 42> 병풍 속의 사후선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소장: 해군사관학교

  

2. 조선(漕船)


  조선을 조운선(漕運船)이라고도 한다. 경상도와 전라도 남부 지방의 세곡(稅穀)을이 배로 한양(漢陽=서울) 근처 서강(西江)으로 운반하고 경창(京倉)까지 납곡(納穀)을 한다. 조운선(漕運船)은 당두리의 기본 구조 위에 삼판 두 장을 더 올려서 선복즉 선창의 용적을 더 늘렸다.

  

  노량진에 주교(舟橋)를 가설할 때 조운선이 징집되어 주교 다리의 밑 받침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림 43> 조선(조운선)의 복원 모형  S= 1/20

전시: 국립해양유물전시관, 復元: 李元植-設計. 元仁古代船舶硏究所-造船 1993. 10.


3. 사견선(使遣船) = 통신사선(通信使船)


  임진년(1592년)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1598년 8월에 히데요시가 죽고 조선에 침입하였던 일본군들이 패전을 거듭하자 패퇴하여 철군하게 된다.

  

그 뒤 이에야쓰가 일본의 대권을 잡게 되자 대마도의 종의지를 통하여 히데요시의 침략을 사죄하는 사신을 조선에 보낸다. 조선에서는 사명대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접촉하게 하였다. 그 뒤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모두 12차례나 공식적인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이 때 통신사 정사(正使)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 일행과 역관(譯官)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가는 배를 사견선(使遣船=사신 파견선) 또는 통신사선(通信使船=통신사가 타는 배) 또는 도해선(渡海船=바다를 건너가는 배)이라고 하였다. 공식 명칭은 조선통신사선(朝鮮通信使船)이다.

  

사견선(使遣船)은 전선의 기본 선형 구조로 되어 있다. 다만 포판(鋪板) 위에 판옥(板屋) 대신에 객실 누각(客室 樓閣)을 꾸몄다. 돛폭에는 가장자리에 청색 단을 둘렀다. 사견선은 통영과 각 수영에서 건조하게 하고 기선(騎船)할 사람들도 수군에서 충당하였다.


 

 

<그림 44> 조선 시대의 사견선 (조선통신사선)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사진: 김재근 교수 제공

 所藏: 慶應義塾大學校


 

 


<그림 45> 사견선 선체의 전개도(展開圖) (이원식 도면 1990)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原典: [軒聖遺稿] 



 

 


<그림 46> 사견선 평면도 (이원식 도면 1990)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원전: [軒聖遺稿]

 

 

<그림 47> 조선통신사선의 복원 모형  S= 1/10

     전시: 국립해양유물전시관

 復元: 李元植-設計. 元仁古代船舶硏究所-造船 1993. 10.


   <표 3> 교린지(交隣誌)의 사견선(使遣船) 칫수(値數)

                                                        단위 : 영조척(營造尺) 

구   분

대선

중선

소선

   뱃밑(底板)의  길이

71.25

66.25

60.75

   뱃밑 이물 머리-너비

10.50

10.50

 7.00

   뱃밑 한판 허리-너비

12.25

11.75

11.50

   뱃밑 고물 꼬리-너비

10.00

 9.75

 7.00

   뱃집(上粧)- 길이

96.25

92.00

85.15

   뱃집(상장) 한판-너비

31.00

30.50

25.15

   이물 중앙 곡목-길이

15.75

15.75

15.75

  參考 文獻 : [증정 교린지(增訂 交隣誌). 1802]


4. 관선(官船)


  쌍돛을 단 바닷배(雙帆 海船)

  우리 나라 배의 만듦새를 사실적으로 잘 나타낸 그림이다. 배의 길이는 약 10발, 너비는 3발 반, 배의 높이는 1발 반 정도가 된다. 뱃전은 7 폭을 무으어 올렸다. 이물 돛대와 한판 돛대는 겻집(鋪板) 위에서 뉘었다(偃桅) 세웠다(竪桅) 할 수 있게 하였다. 돛은 부들 풀(香蒲)로 짠 자리돛(風席) 또는 사자리 자리돛(風席)을 돛대에 매어 달았다.  


 

 


<그림 48> 출범도(出帆圖=쌍돛을 단 바닷배)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複製畵: 元仁古代船舶硏究所 所藏

 원서: 관아제 조영석의 출범도(묵화),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5. 전통 한선(傳統 韓船)


  (1) 민간의 바닷배(海船) - 어염 상선(地土船)

  바닷배에는 돛대가 없는 거루(삼판은 셋), 돛대가 하나 달린 야거리(삼판은 다섯), 돛대가 둘 달린 당두리(삼판은 일곱)가 있다. 민간 한선의 바닷배의 치(鴟=舵))는 고물비우의 바깥쪽에서 뱃밑 앞쪽으로 내리 꽂게 되어 있다. 배가 낮은 곳으로 지나가다가 모래 벌에 걸리게 되면 키는 저절로(自動的으로) 뒤로 빠져 올라가게 된다. 아래 그림의 야거리는 인천 앞 바다에서 잡은 고기를 노들강(鷺梁津 江)으로 싣고 올라와 고기를 풀고 강가에 대어놓고  있다. 치(舵)는 위로 솟아 나와 있다.  

 

 

<그림 49> 바닷배 야거리(單帆 海船)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寫眞: 元仁古代船舶硏究所 所藏

 정성길 선생 제공


<표 3-5> 바닷배의 치수

구     분

길    이

너비

길이와 너비의 비율

큰배    (大船)

     42자(=12.7m) 

18자 9치(=5.72m) 이상

2.22 : 1

중간 배 (中船)

33자 6치(=10.18m)

13자 6치(=4.12m) 이상

2.47 : 1

작은 배 (小船)

18자 9치(=5.72m)

 6자 3치(=1.91m) 이상

3.00 : 1

  1930년경에 실시한 바닷배에 대한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바닷배의 길이: 너비(長:廣)의 평균 비율은 3 : 1 이다.

 

<그림 50> 바닷배 당두리(쌍돛 바닷배)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사진: 정성길 선생 제공 


  (2) 민간 한선의 구분

  한선의 바닷배는, 기본 선형은 같으나 그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서 짐배(貨物船), 상고선(商賈船), 고기잡이배(漁船) 등으로 구분한다. 아래의 배는 1964년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던 전통적인 고기잡이배이다. 이 배는 강화도 어류정(漁遊井) 앞 바다에서 새우잡이를 하고 있는 ‘곶배’이다. 만듦새는 전통적인 한선(韓船)과 같다. 배밑은 평평(平平-平底)하고 삼판에는 피쇠(皮槊=참나무 못)를 윗판에서 아랫판으로 때려 박았다. 선체의 내부를 보면 장쇠가 삼판 마다 꿰어 있고 굵은 한판 멍에 뒤에는 돛대가 세워져 있다.   


<그림 51> 강화도의 고기잡이 곶배(漁船)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사진 : 이원식 1964


  (3) 한선(韓船)의 고물비우


<그림 52> 곶배의 고물비우와 칫다리(舵身)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寫眞: 이원식 1964


  고물비우는 고물의 배밑에서부터 좌우 삼판 사이의 공간을 가로다지 널로 막는데

뱃밑에서부터 위로 비스듬히 올라가면서 바깥쪽에서 삼판 단면에 덧대어 박는다.

치(鴟=舵)는 고물비우의 바깥쪽에 설치한다.  칫다리(舵身)를 위쪽 뒤에서 비스듬히 앞쪽 아래로 고물비우를 따라 내리면서 나무 고리 사이에 꽂아 배의 물밑으로 내리 꽂는다. 이러한 치(舵)를 전향타(前向舵)라고 한다. 이것이 한선의 고물비우와 치의 독특한 만듦새이다.


  (4) 나룻배

  조선시대의 나룻배는 강의 길목에 있는 도진(渡津)에 소속되어 있어서, 나루를 건너려면 도진 별장의 검문 검색을 받아야만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림 53> 한강의 나룻배(渡船)

出典: 이원식 [한국의 배] 대원사 1990


2. 해선의 기본 선형 (민간선의 구조와 사용 용도)


  거루(艍舠) - 小小船 (크기 : 4-5m) :

  만내(灣內)에서 돌아다니는 배. 일본의 전마선과 같은 배 - 소화물을 운반하거나 해안 에서 해조류등을 채취한다. 낚싯배로도 사용한다.

  야거리 - 小船 (크기 : 7-8 m) :

  가까운 바다를 왕래하며 화물이나 어장의 고기를 실어 나르는 운반선, 돛대 하나를 세우고 사각형의 조선식 돛을 메어 단다. 연해안에서 어망으로 어로 활동도 한다.


  당두리(唐道里) - 中船 (크기 : 14-16m) :

  당두리는 돛대 두 대를 세우고 사각형의 조선식 돛을 각각 메어 단다. 상고선(무역선)은 연안을 따라 왕래하며 많은 화물을 싣고 장사(貿易)를 한다.

  어선은 원근해로 나아가 어망이나 낚시로 직업적인 어로 활동을 한다.


3. 해선의 규모 및 치수


  경국대전에 바닷배의 치수를 아래와 같이 정하여 놓았다.


<표 4> 바닷배의 치수

구 분

길 이

너  비

길이:너비의 비율

대 선

  42척(=12.72m)

18척 9촌(=5.73m) 이상

2.22 : 1

중 선

  33척 6촌(=10.18m)

13척 6촌(=4.12m) 이상

2.47 : 1

소 선

  18척 9촌(=5.73m)

6척 3촌(1.91m)이상

3.01 : 1

  1930년도 서남해안에서 고기잡이하던 어선의 길이와 너비의 비율은 평균 3.0 : 1 이었다.


2. 일본배의 역사


  일본의 화선은 두갈래로 하여 발달하여 왔다. 그 하나는 뗏목배로서 벌선형(筏船型[이까다부네가다] 또는 부형(桴型[무네가다])이라 할 수 있고, 그 둘은 통나무쪽배로서 고선형(刳船型[구리부네가다])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태평양 연안이나 瀨戶內海를 중심으로 하는 해역의 해안에서는 고선형이 발달하였으나, 일본의 서해안과 쓰시마 규-슈 등의 일부 해안에서는 벌선형이 발달하였다. 고선형은 준구조선으로 발전하여 왔지만 벌선형 또는 부형은 그대로 머물러 더는 발전을 하지 못하였다. 

 

  그후 단계로는, 남방과 한반도에서 도해하여 온 도래인에 의하여 구조선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 예로서 신라의 조선장이 武庫(지금의 兵庫)에 와서 신라식 해선을 건조하였고(저명부씨선→이세선→안택선→화선으로 발전), 백제의 조선장이 안예국에서 견수선 견당선을 건조하였다(안예식선→광도식선→붕판조식선→화선으로 발전). 한편 일본의 북해 연안에서는 한반도의 뗏목을 저판으로 하는 벌평저판식(筏平底板式) 선형이 도입되어 면목조식 선형으로 발달하여 왔으나 화선식에 밀리어 더 발전은 하지 못하였다.


  일본 배(화선)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선형은 三板式이다. 즉 삼판杉板(현판-외각판)을  삼단으로 삼판만 무으는 것을 말한다. 소형이던 대형이던 간에 모두 삼단 삼판식으로 조선을 한다. 그래서 영어로 화선식의 배를 “SAMPAN=三板”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일본에 전래된 조선 기술은 (瀨戶內海를 중심으로) “붕판조(棚板造)” 삼판식을 기본으로 해서 발달된 것이며 선재가 풍부한 日本에서는 오파닉式 칠판식 구판식을 도입하지 않아 7-8-9 世紀를 전후로 해서 한선식의 대형선 조선 기술을 더 이상 도입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니 “棚板造”의 기술은 그 이상의 발달을 보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나 배의 상장 구조와 그 상장 건축 기술은 상당한 발전을 하여 호화스러울 정도로 발전하였다.


3. 중국 당송시대의 선박


3.1 선체의 구조


지금까지 발굴된 선박 중에서 보존이 가장 잘된 것은 천주선(泉州船)으로서 출토 당시 선체 갑판위의 구조물은 부식되어 없었으나 아래 부분은 존재하여 그 당시 조선기술이 어느 수준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3.1.1 용골2)과 외판

  

천주선의 용골은 세 개의 소나무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림 5-3>과 같이  전, 후 2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과 뒤 부분은 위로 만곡되었으며 중간부분은 장부촉이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龍骨의 전체길이는 1,765cm이고 주용골의 길이는 1,240cm이다. 용골의 횡단면은 폭이 42cm, 두께가 27cm이다. 선미용골의 길이는 525cm이며, 횡단면의 치수는 주용골의 치수와 같다. 용골의 앞부분은 선수재와 연결되어 있다.

 

주용골의 외부에는 삼목판을 덧붙였는데, 그 두께는 약 5cm이고 못으로 고정하였다. 발굴당시 일부만 남아있었지만 용골의 양측과 선저부분에도 이러한 목판을 부착하였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는 주용골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선미의 용골과 선수판은 위로 쳐 들렸으며 외판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1.龍骨 2.隔艙板 3.肋骨 4.頭桅座 5.中桅座 6.舵承座 7.外板 8 舵孔 9.船首材


<그림 54> 천주선의 평면도, 중앙종단면도, 중앙횡단면도3)

   

外板은 2겹 혹은 3겹의 木板으로 중첩된 구조인데, 내층 木板 두께는 8.2cm~8.5cm이고 상하자모정순합으로 연결하였다. 중간층 외판의 두께는 5cm이고, 외측의 외판 두께는 4.5~5cm이다. 용골로부터 내측좌우에는 각각 14열 목판이 있고, 외측에는 좌현이 16列, 우현이 15列이다.

 

3.1.2 수밀격벽


선창과 선창사이는 격창벽(隔艙壁)을 이용하여 칸을 막았다. 격창벽은 여러개의 목판으로 되었는데 숫자는 일정하지 않다.

  보통 격창판의 두께는 10~12cm이며 판과 판은 장부촉이음 방법을 사용하였다. 각 격창의 위쪽에는 아주 뚜렷한 격창판의 장부촉이음자리가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장부촉이음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설명한다. 사용된 목재는 대부분이 삼목(杉木)이고 그 외 장목(樟木)도 사용되었다. 장목은 용골과 가까운 곳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설계자가 용골과 가까운 곳의 격창이 항상 물에 젖기 때문에 내수성이 우수한 장목을 사용하여 부식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4) <그림 55>는 tnalfrurqur의 구조도이다.

  


<그림 55> 水密隔壁5)


각창에는 수밀격벽이 있다. 창벽에서 용골과 가까운 곳에는 12×12cm의 구멍이 있다. 격창판은 장부이음촉으로 상하를 연결하였으며 틈새는 염료로 메웠다. 격판과 격판, 격판과 선내판사이의 연결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扁形鐵鋦과 板鋦이 사용되었다.


수밀격벽의 설치는 여러 방면에서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선박의 항침성(抗沈性)을 높이고 인원과 화물의 안전성을 확보한다. 선창과 선창이 격벽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항행중, 특히 원양항해중에서 한, 두 개 혹은 몇 개의 선창에 물이 스며들어도 다른 선창으로 흘러 들 수 없다.


둘째, 분창은 화물의 적양작업 및 관리에 편리하다. 위에서 서술한 천주선에서는 출토당시 각 선창마다 많은 화물이 나왔다. 화물에는 화주의 이름이 새겨진 이름패도 있었는데, 그 당시 화물을 분창하여 실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분창으로 인해 화주들은 동시에 각기 다른 선창에서 화물을 적양할 수 있기 때문에 작업효율이 크게 향상될 뿐만 아니라 화물의 관리도 아주 편리하다.


<그림 56> 扁形鐵鋦 및 使用說明圖6)


셋째, 격벽판과 외판이 단단히 접합되어 선체의 횡강도를 높였다.

이런 우수성과 안전성 때문에 인도양과 남해일대를 거쳐 중국을 왕래하는 아랍상인들 대부분이 중국의 宋船을 이용하였다.7)


3.1.3  조선재의 접합술

   

목선에 있어서 조선재의 접합방법은 못, 장부촉이음, 틈막이 등기법이 있다.8) 外板의 연결방법은 횡으로는 <그림 57>과 같이 평접과 탑접을 혼용하였고, 종으로는 滑肩同口, 斜角同口, 直角同口 등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림 58>는 외판의 종연결방법이다.

  (1) 탑접기술                          (2) 평접기술


  <그림 57> 搭接技術과 平接技術9)

(1) 滑肩同口               (2) 斜角同口               (3) 直角同口


<그림 58> 外板의 縱連結方法10)

<그림 59> 釘榫接合技術11)


         

                 (1) 鐵釘                             (2) 鐵釘의 使用法-1

   3)철정의 사용법-2

  <그림 60> 鐵釘과 그 사용법12)


송대의 목선은 장부촉이음 방법과 철정으로 보강하는 技法을 널리 사용하였다.

종횡연결은 장부로 연결하였고 틈새는 마, 桐油, 회를 사용하여 만든 염료로 메웠으며, 강도를 높이기 위하여 철정을 박았다.


3.1.4 염료와 염봉기술(舟念 縫技術)


선판과 선판의 틈새는 마, 동유, 석회를 섞어 만든 염료로 메웠지만, 선판자체의 틈새, 구멍, 벌레구멍은 동유와 회를 섞어 만든 염료로 메웠다. 선박을 건조할 때 쇠못을 박은 후 부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철정을 목판 안으로 깊숙이 박아 넣고 그 위에는 유회염료로 철정을 완전히 덮어 공기나 해수와의 접촉을 피하였다.13)


3.2 선박의 속구


3.2.1 타(舵)


  타는 선박의 항행 방향을 조종하는 중요한 설비이다. 즉 타는 배의 항로를 바로잡아 항로이탈을 방지한다. 그 후 타는 여러 종류로 발전되었고, 송대에는 다음과 같은 타들이 사용되었다. 


“昇降舵”는 수심의 깊이에 따라 상하로 위치를 조절할 수 있는 타이다. 선박이 수심이 얕은 수역에 진입하거나 타가 필요하지 않을 때는 활차를 이용하여 들어올릴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타가 물에 대한 저항력을 감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가 水底에 부딪히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해선의 승항타는 대부분 선저 아래까지도 내려갈 수 있는데 이런 깊이의 수심에서는 타가 선미에서 생기는 수류나 수압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타의 효율을 높이고 배의 횡요14)를 감소시킨다. 송대의 使臣 徐兢은《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박의 뒤쪽에 정타가 있는데 대소 두개로 나뉘며 수심의 깊이에 따라 수시로 바꾼다.” 더욱이 역풍항행을 할 때 승항타는 돛과 함께 항행방향을 조종하여 배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 <그림 61>은 승항타의 구조도이다. 





<그림 61> 昇降舵15)




(1) 三角平衡舵             (2) 淸明上河圖의 平衡舵


<그림 62> 平衡舵16)

   

宋代에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타는 “평형타(平衡舵)”이다. <그림 62>와 같이 평형타는 타면의 일부를 타간의 앞부분에다 장치하여 타면의 압력중심과 타축의 거리를 단축시켰으며, 이로 인해 타를 조종하는데 힘이 적게 들고 타의 회전이 빨라 선박을 신속하게 변침17)시킬 수 있다. 송대 화가 장택단의 명작《淸明上河圖》에 있는 객선과 화물선은 모두 이런 평형타를 장치하였다.18)


<그림 63> 開孔舵19)

<그림 64> 舵 받침대20)


宋代에는 타면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은 “개공타(開孔舵)”도 사용되었다. 타공은 타의 성능에 영향을 주지 않고, 타를 조종할 때 힘이 적게 든다. 이런 개공타는 남방의 일부 內河船이나 바다에서 항행하는 목범선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그림 63>은 개공타이다.


선미에 장착한 타를 고정시키고 선체의 강도를 보강하기 위하여 선미에는 타 받침대를 설치한다. <그림 5-23>은 타 받침대의 모형도이다.


3.2.2 帆과 桅


宋代에 사용하였던 돛의 형태는 장방형(長方形), 선형(扇形, 부채꼴형), 上部는 선형이고 下部는 장방형인 혼합형으로 나뉜다. 그 중에서 혼합형이 가장 많다.


돛을 올린 후 돛면과 돛대의 상대위치에 따라 평형범, 반평형범과 불평형범으로 나뉜다.21) <그림 65>는 中國 돛의 구조도이다.

<그림 65> 中國 돛의 構造22)


   (1) 平衡帆                

 

 (2)半平衡帆           

 

   (3) 不平衡帆


<그림 66> 帆의 外形23)


최초의 돛배는 돛을 하나만 사용하였고 돛도 크지 않았다. 그 결과 바람이 작을 때는 배가 빨리 달릴 수 없기 때문에 점차 돛의 수를 증가하고 돛대의 위에도 돛을 설치하였다. 그 후 선체가 대형화됨에 따라 하나의 돛대로 많은 돛을 설치할 수 없어 두 개, 세 개, 네 개의 돛대를 가진 선박을 건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림 66>은 그 당시 中國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돛이다.


돛이 많을수록 풍력을 충분히 이용하여 선박의 속력을 높일 수 있는 반면 조작이 복잡한 문제점도 있다. 특히 폭풍이 갑자기 불어 올 때 즉시 돛을 내리지 못하면 돛대가 부러지고 선박이 전복될 위험이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 돛의 수를 줄이기 시작하였는데 2개나 3개만 설치하고 하나의 돛대  하나의 돛만 설치하였다.


돛의 수가 적어졌지만 돛폭을 증가하여 受風 면적을 크게 하였기 때문에 항속에는 큰 영향이 없다. 그리고 천으로 만든 돛폭에 대나무가지를 꿰어 활대로 삼았다. 이런 돛은 돛폭을 곧게 펼 수 있어 역풍 항행에 유리하며 대나무 사용으로 강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쉽게 찢어지지 않는다. 그 외에도 자신의 무게에 의해 신속히 돛을 내릴 수 있다. 송대 해선에서 사용된 돛은 일반적으로 돛대 뒤 부분에 있는 넓은 쪽의 변두리를 곡선형으로, 상부는 좁고 하부는 넓게, 혼합형으로 만든다. 이런 형태의 돛은 바람의 압력중심이 더욱 낮아 배가 전복될 위험이 작다. 배가 폭풍을 만나 돛을 내릴 때 돛의 면적이 점차 작아져 배가 받은 풍력도 점차적으로 작아진다. 반대로 돛을 올릴 때는 돛의 면적이 신속하게 증가되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바람을 이용하여 배를 전진시킬 수 있다.24) <그림 67>은 중국 고대선의 설비명칭도이다. 

<그림 67> 中國 古代船의 設備名稱25)

3.3 결론


   唐宋時代의 조선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元, 明時代 조선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에 토대가 되었다.

    唐宋時代에 건조된 선박은 현대선박에서 채택하고 있는 우수한 조선기술을 이미 상당부분 구사하고 있었으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용골과 大 및 舭板을 설치하여 종강력을 높였다.  

   둘째, 천주발굴선의 경우 2중, 3중의 덧댄 특수한 구조의 외판을 설치하였다.

   셋째, 수밀격벽을 설치하여 횡강력을 높이고 일부구획이 침수하였을 경우에도 선박의 침몰을 방지하게 하였다.

   넷째, 갑판상에 大梁拱을 설치하여 갑판상에 유입한 해수가 원활하게 배수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예비부력26)을 증가하였다.

   다섯째, 조선재의 견고한 연결을 위한 정순접합기술(釘榫接合技術)을 개발하였다.

   여섯째, 외판 및 갑판의 이음틈새로 해수가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염봉기술을 개발하였다.

   일곱째, 추진력을 제고하기 위하여 여러개의 돛을 설치하였으며, 사풍기술을 완전히 파악하였다.

   여덟째, 선박의 안전한 정박을 위하여 여러개의 닻을 사용하였으며 가장 큰 것은 몇 백근에 달하였다.

   아홉째, 횡압류를 방지하기 위한 피수판, 중삽판, 태평남등이 개발되어 역풍항해가 가능하였고 선체의 횡요를 막기 위한 태평남을 개발하였다.


4. 제주배의 역사


4.1. 덕판배


  동풍 부는 초하루 햇살 밝은 조천포구 (東風初日昭朝天)

 20척 말 실은 배 띄워 보내네 (泛送卄舟수載馬船)

 멀리 바라보니 배 속의 말 보이지 않고(遠望不見船中馬)

 다만 배의 쌍 돛만 보이네(但看船有雙帆懸)

 듣건대 화류(화馬留;名馬) 몇 백 필을(聞道화馬留百千匹)

 감리(監吏)가 해마다 호송한다하네(監吏押領年復年)

 

  위 시는 말을 싣고 떠나는 덕판배를 묘사한 제주 유배인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의 시 '말 싣는 배(載馬船)' 가운데 일부분이다.


  제주배의 크기는 「건륭오십구년오월일보초등록(乾隆五十九年五月日報草謄錄)」은 진상마(進上馬)를 제주목· 대정현·정의현 등 삼읍의 사선(私船)으로 수송했던 일을 적은 기록이다. 이 문서는 제주 삼읍(三邑)의 사공(沙工) 12명의 이름과 배의 크기, 말을 실은 숫자가 적혀 있어서 진상마를 실었던 제주 덕판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문서에서 가장 작은 배는 4파(四把) 크기로 실었던 말의 수는 낙장돼 알 길이 없다. 4파반(四把半)의 배에 실은 말은 28마리~29마리, 5파(五把)의 배에는 28마리~29마리, 35마리까지 실었고, 5파반(五把半)의 배에 33마리~34마리, 6파(六把)의 배에 33마리의 말을 실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파(把)란 어른이 양팔을 벌린 크기(拱把)가 아니다. 이 때 크기는 모두 영조척(營造尺)을 쓴다. 「경세유표」 <均役事目追議>의 '均役廳量船尺'은 10척(尺)을 1파(把)로 규정하고 있다. 전라도의 경우 배는 모두 9등으로 나누고 있지만, 지방세인 경우 간략하게 3등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1등 대선은 6파반 이상, 2등 중선(中船)은 6파~4파, 3등 소선(小船)은 4파에서 2파반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파(=척)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척은 0.303m이므로 대선은 19.69m 이상, 중선은 18.18~12.12m, 소선은 12.12~7.57m이다. 위의 자료를 기준으로 한다면 진상마를 실었던 덕판배의 크기는 12.12m이상 중선배 이상으로 추정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전통 어선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추자도가 제주도를 드나드는 길목으로서 제주배와 흡사한 전통배를 사용했다고 한다.

  추자도 덕판배 제보자에 따르면 덕판배의 규모는 25~30m, 폭은 3.5m, 깊이는 1.8~2m이며, 닻을 올리는 호롱파, 앞이 넓은 모시, 타락(옆 난간)은 거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광목을 잇대어 법포를 만들었다고 한다. 보통 두 개의 돛대가 있었고 제주도와 본토를 다닐 때 썼다고 한다. 배의 재료는 삼나무나 강원도 적송으로 건조되었으며 추자도에 4~5척이 있었다고 한다.

  덕판배는 물칸이 없으며 멸치, 조기, 갈치 등 시기에 따라 다양한 어업을 한다. 배올리기는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공동으로 작업을 하는데, 주로 태풍을 대비하여 배를 올린다고 한다. 따라서 배를 올릴 때는 배 밑에 “궁글목”이라고 하는 동그란 돌과 굄목을 받치고 소리를 내며 배를 끌어올린다.

  배를 항해할 때는 일기와 조류의 움직임을 잘 파악하고 항해한다. 따라서 추자도에서 목포까지 항해할 때는 밀물과 썰물에 맞춰 항해하고 물 흐름이 바뀌는 시점에서는 한적한 곳에 배를 잠시 쉬었다가 조류가 바뀔 때 운행한다고 한다.


4.2 떼배


  떼배는 선사시대 이래 강이나 바다에서 간단한 고기잡이, 해초 채취, 이동수단 등로도 쓰였던 원시형태의 뗏목이다. 떼배는 이물과 고물에 말뚝을 박아 닻을 매달았으며, 닻은 주로 돌닻을 사용했다. 노는 둘이서 젓는 방식은 한노와 같으나 노 등위에 튀어나온 손잡이가 없다. 떼배를 사용치 않을 때는 분리하여 해변에 올려놓아 보관한다.



5. 결론


5.1 한선의 장점


 (1)평저선인 한선은 독특하한 사각범(범포의상연하연사이에죽봉을횡으로3자 간격으로 매어 달아 바람을 범포의 전면에 받을 수 있게 만든 것)을 달아 올려 바람을 받아 행선하는데 순풍(順風=배의 등뒤에서 받는 바람) 을 받게되면 돛을 좌우로 활짝 펴서 최고의 속력으로 달려 나아가게 된다.

 (2) 한선은 옆쪽에서 불어오는 바람(側風)이나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逆風)을 받아도 갈지자(之字)로 즉 지그재그로 행선 할 수 있다.

  임진왜란때 혁혁한 공을 세운바 있는 거북배(龜船)에 대하여 명나라의 해방의(海防議)라는 책에서 아래와 같이 평가를 하였다.


  [龜船之制]에 「皇明華鈺海防議」云: “朝鮮龜船布帆竪眠惟意風逆潮落亦可行, 卽指公所創之船也”.


  [龜船의 制度]에 “明나라 화옥이 지은 海防議」라는 책에 “朝鮮의 龜船은 돛대를 세웠다 뉘 우기를 마음대로 하고 역풍이 불거나 썰물에도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이는 公(李舜臣)이 창제한 귀선을 가르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3) 韓船은 이물비우(艫板=船頭板)가 횡으로는 편평하지만 선두판 상부에서 선저까지는 스키(SKI)의 앞 뿌리와 같이 원형으로 완만한 유선형을 이루고 있어서 바닷물 위를 미끄러지듯 파도를 타고 앞으로 나간다. 마치 해병대의 상륙정의 선두와 같은 기능을 한다.


  (4) 한선은 이물(艫=船頭)이 평판상이기 때문에 물의 저항을 받아 파도를 가르고 나가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최근에 대형상선, 유조선, 전함들이 선수에 커다란 철구(鐵球)를 메어 단것 같은 구조를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반대로 파도가 높이 칠 때 한선은 파도 위를 타고 나아가기 때문에 바닷물 속에 처박히지는 않는다. 큰 파도가 치면 선수가 뾰족한 화선(單條 船首材構造)은 선수가 파도를 가르고 간다는 것이 오히려 파도속으로 들어가 물 속으로 처박히게 된다.


  (5) 한선은 선저재인 환목의 옆구리를 긴 참나무창(眞木長槍=長槊)으로 투입하여 연결하고, 배의 횡강력을 지탱하기 위하여 장쇠(가룡목=양측 각각의 삼판에 사각혈을 뚫어 관통 하는 것)를 걸고, 삼판을 참나무 못(眞木釘)으로 “S”자 모양으로 투입하여 봉합하기 때문에 사나운 파도가 칠 때 각부의 결합부가(結構) 유연성을 가지고 조금씩은 이완되어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데 이것이 오히려 파선을 방지하고 파도의 흐름에 따라 같은 힘으로 유동하게 된다. 결하부를 너무 견고하게 고착시키거나 접착제등으로 부착하여 놓으면 파도가 칠 때 유연성이 없으므로 파괴되고 만다.


  (6) 선저가 편평하기 때문에 배의 복원력은 좋지 않으나 (이를 보정하기 위하여 무거운 화물을 선창 바닥에 싣거나 화강암 같은 바윗돌을 선처에 설치하고 고정시킨다. 배의 중심을 낮추기 위하여 설치하는 것이다) 편평하고 넓은 갯벌에서는 배의 운용이 유리하고 편리하다.


  (7) 진행방향을 돌려 행선 하고자 할 때, 흘수(물 속에 잠긴 부분)가 비교적 얕기 때문에 회전 반경이 짧다. 180도를 회전할 때 멀리 돌지 않고 짧은 거리에서 회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회전속도가 빠르다. 따라서 기동성이 우수하다. 그러나 측풍이 불 때는 배가 바람이나 파도에 밀려 나가는 일이 있다.


  (8) 한선은 선재가 두텁고 무거우며 선체가 길고 크기 때문에 고대에 있어서 水戰을 하는 함선 즉 전함의 경우에는 유리한 점이 많았다. 현판의 조립은 중첩식(Clinker=Over Lapping-Built)에 봉합은 참나무 목정을 사용했다. 선재가 두텁기 때문에 성난파도가 치거나 웬만한 충격에 능히 견디고 적탄에 맞아도 쉽게 파손이 인된다. 전함인 판옥선은 현이 높고 선체가 장대하기 때문에 적병이 배로 넘어오기  어려웠다.


  그러나 선체가 육중하기 때문에 배의 운용이 힘들고, 조선 비용 (선재와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단점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日本의 배는 선재가 얇고 가벼우며 짧고 작기 때문에 조선비용이 적게 들고 直材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공작이 용이하며 배의 운용이 쉽다. 그러나 선체가 短小하고 경박(輕薄)하기 때문에 전쟁을 하는 전선의 경우는 포탄에 맞으면 선재가 파손되고 풍파나 가벼운 충격에도 배가 파열되며 심할 경우에는 파선이 된다. 비교적 좁은 평저선에 너비가 넓고 두께가 얇은 현판(下棚,中棚,上棚의 三板으로 됨)을 철침으로 봉합하기 때문에 쉽게 파선을 하게 된다.


5.2 한선의 구조적 특성


  (1) 뗏목과 같이 편평한 뱃밑= 평저판  

  (2) 저판의 통나무를 횡으로 관통하여 꿰어 박은 길다란 참나무창인 가쇠= 장삭

  (3)선저 좌우 도련을 따라 턱을 따고 그 턱 위에 다음 삼판을 겹쳐 얹어서 무으  어 올린 중첨식 삼판= 삼판(杉板)  

  (4)윗 삼판의 밖 갓 쪽에서 아래 삼판 안쪽으로 S자 모양으로 꿰어 박은 참나무  못인 피쇠= 피삭

  (5)곧은 널판때기를 횡으로 대어 박은 선두 횡판인 이물비우= 평 노판, 선미 횡판인 고물비우= 평 축판

  (6) 배의 대들보라고 할 수 있는 멍에= 횡량(가목)

  (7)멍에 아래의 양측 삼판마다에 네모 구멍을 뚫어서 꿰어 걸은 선량인 참나무   장쇠= 장침(駕龍木)

  (8) 범포위에 대나무 활대를 꿰어 걸은 사각형 돛= 帆 

      

   위와 같은 특성은 한선의 장점 이기도 하다.


  서양, 일본, 한국에서 판자에 船釘을 박아 조선 하는데 왜 바느질을 하듯 봉합한다고 하느냐 하면 옛날에 배를 만들 때 판자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다 짐승 가죽끈을 넣어 잡아 메어 가면서 배를 조립했기 때문에 봉합이라고 한다. 지금도 폴리네시아의 섬에서는 판자에 구멍을 뚫고 가죽끈으로 메어 가면서 쪽배-카누를 만들고 있다. 한선에서 사용하는 참나무 못을 “피새”라 하고 한문으로 “皮槊”이 라고 쓰는데 피라는 글자는 가죽끈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배를 조선할 때 참나무 못(皮槊=피새)을 船釘으로 사용하는데 나무못을 만들기 전에 그 참나무 재료를 사람의 오줌(尿)을 받아 놓은 오줌독에 담가 두었다가 나무의 수액이 오줌의 성분과 화학적인 중화작용이 끝난 후에 꺼내서 船釘을 만든다. 그래야만 船釘이 충격에 의해 부러지지 않고 또 부식이 더디게 되어 수명이 오래간다. 배를 만들 때 손을 거들어 주지 않는 사람에게 “배를 짓는데 우리 배에 오줌이라도 누어 주었느냐” 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선저나 삼판의 연결부 즉 이음새에는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수밀이 될 만한 것으로 막아 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뱃밥 이라고 한다. 뱃밥으로 사용하는 것은 竹나무의 속을 훑어 낸 속껍질, 솜, 헌 옷 조각, 실, 삼나무 껍질 등인데 이것을 나무와 나무 사이의 이음새에 끌(錯) 같이 생긴 “알기”라는 연장으로 때려 박아 넣는다. 근래에는 삼나무 껍질(木皮)을 주로 사용한다. 옛날에 중국에서는 뱃밥을 친 후에 그  위에다 백연을 오동나무 기름으로 개어서 메웠다고 한다.


  배를 육지에 올려놓고 선저=뱃밑를 장작 불이나 솔가지 불로 그슬려 주어 선체 외부에 얇은 탄소층(숫 검댕이)을 만들어 준다. 이러한 탄소층에는 석화, 해선충=䖻, 해수세균 등이 기생도 못하고 번식도 못하게 된다.

  선저를 그슬려 주는 것을 훈연이라고 한다. 한 달에 한번씩 훈연을 안 해주면 선저나 삼판에 굴이 들러붙고 해선충과 해수 세균이 부식을 일으켜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조그만 한 바늘구멍 틈으로 물이 새어 들어 오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나무 조각이 부스러져 나간다. 뱃사람들의 말로 이것을 “螦=소” 가 먹는다고 하고 “좀”이 먹는다고도 한다.


5.3 덕판배의 복원


  한선의 기본 선형은 평평한 배밑(평저선), 턱을 따내고 널판을 겹쳐서 무으어 올린 뱃전(杉板), 가로다지 널판때기로 대어 막은 이물비우(艫板)와 고물비우(舳板), 배의 대들보라고 할 수 있는 멍에(橫梁), 멍에 아래의 뱃전마다에 네모진 구멍을 뚫어서 꿰어 걸은 장쇠(長釗=加龍木), 배밑을 가로로 꿰어 박은 길다란 나무창인 가새(長槊), 뱃전을 위에서 아래로 꿰어 박은 나무못인 피새(皮槊)의 만듦새라고 할 수 있으며 뗏목을 底板으로 하는 [벌부평저식방형선(筏桴平底式方型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만듦새는 서양의 V형의 선형이나 일본의 삼판식 반평저형의 선형 그리고 중국의 U펴저형 및 V형의 선형과는 다른 것으로서, 우리 나라의 지리적 지형적 여건과 형편에 알맞게 만들어진 것으로 환경에 적응하도록 독특하게 창안되고 발달되어 온 것이 우리의 평저형의 한선 즉 [벌부평저식방형선(筏桴平底式方型船)]이다.


  제주도는 육지와는 다르게 독특한 생활양식과 관습이 전래되어 왔으나 전통적인 우리배의 기본선형과 다르게 발달되어 왔다고는 볼 수 없다. 떼배에서 쪽배로 쪽배에서 준구조선으로 발달되어 온 과정은 다르지 않다고 확언한다.

  

  일본에서 신라배와 백제선이 전래되어 발달되어 왔듯이 제주도와 일본과도 선박에 대한 부분도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지만, 추론이라는 것은 드러난 사실과 논증을 바탕으로 하여야 한다.


  우리 전통선박은 발굴된 선박이 평저선이고 문헌자료가 모두 평저선으로 기록에 남아있는데 어떤 근거도 없이 첨저선이니 수밀격벽 구조 였다느니 하는 발언은 참으로 무책임 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제주배의 복원은 조선공학자와 역사학자, 항해학자가 공동으로 작업을 하여야 제대로 된 복원이 된다고 생각하며, 우선 1/50 또는 1/10의 비율로 복원모형을 만들어 토론과 고증을 통하여 수정을 거듭하여야 한다고 판단된다.


1) 광개토대왕비


 

2) 선체의 뼈대를 이루어 선박의 선체강도를 지탱하는 부분이며 인체의 척추와 같은 역할을 한다.


 

3) 福建省泉州海外交通史博物館,《泉州灣宋代海船發掘與硏究》, 海洋出版社, 1987年, p.17


 

4)福建省泉州海外交通博物館,《泉州灣宋代海船發掘與硏究》, 海洋出版社, p.19


 

5) 席龍飛, 《中國造船史》, 湖北敎育出版社, 2000年 1月, p.213


 

6)福建省川州海外交通博物館,《泉州灣宋代海船發掘與硏究》, 海洋出版社, p.20


 

7) “航運史話”編寫組, 《航運史話》, 上海科學技術出版社, 1978年, p.148


 

8) 許逸, “8~9世紀 우리 나라 西海 및 隣接海域의 航路와 船型特性에 관한  硏究”, 博士學位 論文, 2000年 2月, p.77


 

9) “造船史話編寫組”,《造船史話》, 上海科學技術出版社, 1979年 9月, p.86


 

10) “水運技術詞典”編輯委員會,《水運技術詞典》, 人民交通出版社, 1980年 10月, p.203


 

11) 許逸, “8~9世紀 우리 나라 西海 및 隣接海域의 航路와 船型特性에 관한  硏究”, 博士學位 論文, 2000年 2月, p.78


 

12) 席龍飛,《中國造船史》, 湖北敎育出版社, 2000年 1月, p.66, p.214


 

13) 李國淸, “對泉州灣出土宋代海船上 料使用]情況的考察”,《船史硏究》, 第2期, p.35


 

14) 선박이 횡방향으로 요동치는 것


 

15) 許逸, “8~9世紀 우리 나라 西海 및 隣接海域의 航路와 船型特性에 관한  硏究”, 博士學位 論文, 2000年 2月, p.83


 

16) “造船史話”編寫組,《造船史話》, 上海科學技術出版社, 1979年, p.27, p.28


 

17) 침로를 바꾸는 것


 

18) “造船史話”編寫組,《造船史話》, 上海科學技術出版社, 1979年, pp.27~28


 

19) “造船史話”編寫組,《造船史話》, 上海科學技術出版社, 1979年, p.28


 

20) 福建省川州海外交通博物館,《泉州灣宋代海船發掘與硏究》, 海洋出版社, p.21


 

21)“水運技術詞典”編輯委員會,《水運技術詞典․古代水運與木帆船分冊》,人民交通出版社, 1980年, p.158


 

22) “水運技術詞典”編輯委員會,《水運技術詞典》, 人民交通出版社, 1980年 10月, p.158


 

23) “造船史話”編寫組,《造船史話》, 上海科學技術出版社, 1979年, p.50


 

24) “造船史話”編寫組,《造船史話》, 上海科學技術出版社, 1979年, pp.47~50


 

25) 席龍飛,《中國造船史》, 湖北敎育出版社, 2000年 1月, p.245


 

26) 배가 파공이 되어도 침몰하지 않을 정도의 예비적인 부력


 

출처 : 우리배의 역사
글쓴이 : 배무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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